게임과 어밴던웨어
자료실을 갖춘 인터넷 게임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종종 이런 글이 올라오곤 한다.
“이제 몇 년 지났으니 이 게임 자료실에 올려도 되지 않나요? 빨리 올려주세요.”
혹은,
“이제 몇 년 지났으니 이 게임 저작권 풀리지 않았나요? 빨리 올려주세요.”
저작권 보호를 위한 국제 협정인 베른조약에 의하면 저작권은 저작자의 사후 50년까지로 규정되어 있다. 단체 명의 저작물은 공표 후 50년이다. 우리 나라도 96년에 가입했으니 게임 출시 후 몇 년밖에 지나지 않은 상태라면 당연히 저작권이 살아 있을 터, 위의 두 번째 요청은 처음부터 성립될 수가 없다. 하지만 첫 번째 요청은 언뜻 비슷해 보이는 외양과는 달리 좀 복잡한 문제를 담고 있다. 이른바 어밴던웨어 문제다. 어밴던웨어는 어밴던(abandon, 버리다)과 웨어(ware, 상품)의 합성어로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버려진 상품을 말한다. 버려진 상품이라니? 언뜻 이상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출시된지 오래 되어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진 소프트웨어’를 말한다고 보면 된다. 오래 되면 오래 된 거지 따로 개념화시켜 어밴던웨어라 부를 건 또 뭔가? 이유가 있다.
저작권 관렵 법에 따르면 보호받는 일정 기간 동안은 저작권자의 허락을 얻지 않고서는 누구도 마음대로 저작물을 사용하거나 출판, 배포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어느 정도 예외를 두고 있기도 하지만 원칙은 그렇다. 게임도 저작권 법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는 엄연한 창작물인만큼 같은 기준이 적용된다. 게임은 주로 제작사 이름으로 발매되므로 단체 명의 저작물로 취급하여 발표 후 50년 동안은 배타적인 권리가 인정된다는 뜻이다. 이에 따르면 2004년 현재 기준으로 1954년 이후에 나온 게임들은 공개 게임이 아닌 이상 다른 사람이 함부로 복제, 배포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50년대라면 아직 컴퓨터는 커다란 덩치의 학술용 도구였을 뿐, 게임이나 하고 놀기(?)에는 너무도 비싼 기계였던 시절이 아닌가. 당연히 전자 게임은 개념조차 잡혀 있지 않던 때였다. 이후 전산 전문가들이 심심풀이 유희용 프로그램을 짜서 놀던 것이 발전되어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전자 게임이 출시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에 들어서부터.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접할 수 있는 모든 전자 게임은 공개 게임이 아닌 이상 저작권이 살아 있다는 말이 된다. 회사가 문을 닫으면 저작권도 소멸될 것이라 오해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발표 후 50년 동안 저작권은 계속 유효하며, 누군가에게 상속되어 계속 존속하게 된다. 저작권자가 포기하거나 공개 선언을 하지 않는 한은 말이다.
그런데 이쯤에서 문제가 좀 생긴다. 50년이 아니라 그 오분의 일인 10년만 지나도 많은 게임들이 품절되어 시장에서 사라진다. 여기서 어떤 간극이 생긴다.
■ 떳떳한 도둑질?
10년이 아니라 20년이 지나도 소수일망정 그 게임을 찾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파는 곳이 없다는 건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제작사도 안다. 그러나 소수를 위해 새로 CD나 DVD 등의 미디어를 찍어낼 수는 없는 일이다. 본전도 못 뽑기 때문이다. 중고 시장이 형성되어 있어 10년 넘은 게임도 정품을 구할 수 있긴 하지만 대단히 제한적이다.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는 도저히 게임을 구할 수 없을 때 게이머는 스리슬쩍 불법 복제로 눈을 돌릴 수 있다. 바로 그 경우에 해당되는 게임이 어밴던웨어다. 말하자면 저작권을 어기는 불법 복제라는 점에서는 떳떳할 수 없지만, 이제 막 출시된 게임이나 한창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게임을 막무가내로 불법 복제해서 즐기는 일과는 그래도 구별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도둑질이라는 점에서 어차피 마찬가지라면 의도가 좀 덜 뻔뻔스럽다고 해서 구별하고 용인해 줄 필요가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한된 범위 안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는 편의상 간단하게 이야기했지만 사실 어밴던웨어는 그렇게 단순한 이유만으로 성립된 개념이 아니다.
대개의 디지털 문화가 그렇듯, 소프트웨어 산업도 하루가 다르게 빠른 속도로 변화해 가고 있다. 더 발전된 기능과 편리함으로 버전 업을 거듭하는 가운데 구 버전 소프트웨어는 빠르게 사용 가치를 상실한다. 더이상 수익을 얻을 수 없는 어밴던웨어가 되는 것이다. PC 게임은 기술적 도구라기보다는 문화 상품의 성격을 갖고 있어 시장에서 생명력이 상대적으로 길기는 하지만 각종 하드웨어와 기술 발전에 많이 종속되어 있어 책과 같은 전통적 미디어에 비한다면 역시 지속 기간이 짧다. 멀리 갈 것도 없다. 10년 전 게임들만 살펴 봐도 알 수 있다. 94년도면 주로 DOS 기반 게임들이 나오던 때다. 지금과 같은 XP 기반에서는 제대로 실행조차 되지 않는 게임들이다. 운영 체제뿐만이 아니다. 하드웨어 호환성도 떨어진다. 지금의 AGP 그래픽 카드로는 당시의 VESA 그래픽을 재현해 내는데 문제가 있으며, PCI 사운드 카드는 당시의 ISA 사운드 카드와 호환되지 않아 소리를 들려주지 못한다. 에뮬레이터가 있긴 하지만 불완전하다. 그래서 업체 입장에서는 오래된 게임을 현재 시장에 내놓는 것이 부담스럽다. 판매를 했으면 책임을 져야 하는데, 이렇게 변화된 환경 아래에서는 사후 지원에 들여야 하는 노력이 판매로 거둘 수 있는 수익을 훨씬 능가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프로그램을 새로 짜지 않고서 사후 지원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새로 미디어를 찍어 내는 것만 해도 큰 부담인데, 이건 아닌 거다. 차라리 품절 선언을 해 버리고 다른 작품에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 낫다. 결국 게임은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
하지만 고전 게임 커뮤니티들이 여기저기 생겨나는 것에서 보듯 어떤 이들은 그 게임을 지금도 즐겨 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길이 없다. 그래서 판매가 중지된 게임들을 불법 복제를 통해 즐기는 것이다. 이미 판매가 중지되었으므로 업체에게는 금전적 손실을 주지 않으리라 믿으면서. 래리 시리즈를 만들어 유명한 알 로위는 “내 작품이 소멸될 바에야 사람들이 다운로드해서 즐겨주는 쪽이 더 좋다”고 말했을 정도니 만든이에게도 그리 배척받는 개념은 아닌 듯하다. 철 지난 게임들이 품절되어 사라지고 소비자들에게도 잊혀져 없어져 버리는 것보다는 누군가 계속 즐겨 주는 사람이 있고 동시에 기억되고 연구되는 쪽이 게임계 전체의 다양성과 건강성을 위해서도 확실히 바람직할 것이다. 게임은 본질적으로 ‘유희’의 문화며 유희는 ‘향유하는 행위’ 그 자체와 함께 보존되고 이어지는 것이 가장 좋기 때문이다. 어밴던웨어가 주장되는 또다른 이유다.
자, 그렇다면 게임에서 어밴던웨어는 만든이도 만족하고 소비자도 만족하고 업체도 손해를 보지 않으니 다 같이 하하 웃으며 해피 엔딩으로 가는 길이라 결론 내려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
■ 양날의 칼, 어밴던웨어
우선 업체 입장에서는 애써 만든 게임을 소비자들이 허락도 없이 돌려가며 즐기는 것이 반갑지 않을 것이다. 단지 감정적인 문제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손해가 없을 테니 업체도 그다지 마음 쓰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지나치게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한 것이다. 오래된 게임일지언정 그 업체가 리메이크나 합본 시리즈 등을 통해 재발매할 여지를 남겨두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고, 어떤 다른 계획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어밴던웨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며 공공연하게 불법 복제를 행한다면 소비자 스스로 정품을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차 버리는 것이고 업체에게도 손해를 끼치는 일이 될 것이다. 설령 현재로서는 아무 계획도 갖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소비자가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업체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를 갖고 있다. 필요하다면 어정쩡한 어밴던웨어가 아니라 프리웨어로 공개할 것이다. 그러므로 소비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철 지난 게임에 어밴던웨어라는 명분을 주어 죄의식 없이 불법 복제를 행하는 것보다는 프리웨어 공개를 요청하고 설득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어밴던웨어가 광범위하게 인정된다면 의도는 아닐지언정 시장에서 게임이라는 상품의 수명을 단축시킬 수도 있다.
또 하나 중요한 문제가 남는데, 바로 기준의 문제다. 구체적인 게임 상품을 두고 누가 어떤 기준으로 어밴던웨어냐 아니냐를 결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시장에서 품절되어 구할 수 없게 되면 그 시점부터 어밴던웨어가 되는 것인가? 아니면 출시 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예를 들어 6 -7년 정도) 어밴던웨어가 되는 것인가? 국내외 다운로드를 제공하는 고전 게임 사이트들은 각자 기준을 갖고 있다. 나름대로 합리성을 갖추고 있다고는 하지만, 자의적인 것이 사실이다. 각자 다른 기준을 갖고 있다는 건 바꾸어 말하면 널리 공인된 구체적 원칙이 없다는 것이며, 언제든 나락으로 떨어질 위험이 바로 옆에서 넘실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게임에서 어밴던웨어는 양날의 칼이다. 시간 속에 묻혀 가는 작품들을 다시 불러와 생명을 이어주는가 하면, 간접적이긴 하지만 상품으로서의 수명을 단축시켜 창작자의 의욕을 꺾기도 한다. 앞에서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어밴던웨어가 일반화되면 몇 년 지난 게임은 불법 복제를 통해 즐겨도 괜찮다는 의식이 자리잡혀 버릴 수 있다.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을 면죄부 삼아 급기야는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이기심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면 충분히 팔릴 수 있는 게임조차 덩달아 일찌감치 퇴출되어 버릴 수 있다. 게임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말들. “이제 몇 년 지났으니 자료실에 올려도 되지 않나요?”라는 질문은 이런 위험성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다. 몇 년만 지나면 게임은 다운로드받아 즐기는 것이 당연하다는 의식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저런 식으로 말을 할 수 없다. 그리하여 그 몇 년이 지나면 이곳저곳 고전 게임 커뮤니티나 자료실을 통해 불법 복제본이 돌게 되는 것이다. 구할 수 없어서 복사하기 시작한 건데, 복사하다 보니 구할 수 없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 더 나아가서 위의 요청에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이 나오기도 한다. “아쉽게도 그 게임은 현재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게임입니다.” 아쉽다니? 구입할 수 있어서 다행이 아니고? 여기서 또 한 걸음 나아가면 드물지만 이런 글도 올라온다. “업체가 돈독이 올라서 5년이나 지난 게임을 아직도 판다!”
이래서는 카피레프트 운동이 불법 복제와 공유를 정당화하는 발판으로 오해된 것처럼, 어밴던웨어도 애초의 취지가 변질되어 와레즈를 비호하는 개념으로 전락해 버릴지도 모르겠다. 소비자 입장에서 어밴던웨어라는 개념을 주장하려면 먼저 어떤 예의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저작물과 함께 저작자의 ‘의견’을 존중하는 의식 말이다.
2004. 12. 29.
포럼과 위키는 트랙백이 없어서 이렇게 링크를 수동으로 신고합니다.
http://www.postadventure.com/wiki/index.php/Abandonware
http://www.postadventure.com/phpBB2/viewtopic.php?t=783
zwei / 덧글에 링크가 두 개 이상 포함되어 있어서 스팸 필터링에 걸렸었나 봐요. 이제서야 발견하고 승인했습니다.